<중증외상센터>는 웹소설, 웹툰 등의 원작은 안 보고 요 근래 TV시리즈만 큰 화제가 되기에 봄. 바쁜척하고 사람 살리는 흉내만 내며 병원과 상관없는 딴 이야기 하는 의학 드라마를 참 싫어하는데 그런 면에서 이 TV시리즈는 합격. 사람 살리는 이야기도, 사람 살리는 사람의 마음가짐 이야기도 충분히 풀어가지만 사람 살리는 것이 어려운 작금의 현실에 대한 이야기도 빼놓지 않는다.
메시지
사명감 뿜뿜 넘치는 중중외상센터 팀. 지금은 통증 하느라 응급의학 및 필수의료 일선에서는 한참 멀어져 있는 나지만 바쁘게 뛰어다니는 주요 인물들을 보고 있자면 생명 갈아가면서 환자 봤던 인턴-레지던트 시절이 생각난다. 그땐 그랬지. 한편으로는 당직동안 일하느라 한숨도 못 자고 고작 한 시간 침대에 누워만 있다 다음날 회진 준비해야 하던 날 병원을 박차고 나갈까 말까 수없이 고민했던 차가운 새벽의 트라우마 또한 떠오른다. 그런 힘들었던 시절 덕분에 나는 아직도 앰뷸런스 소리가 싫다. 사이렌 소리만 들어도 공포감으로 온몸의 신경이 곤두선다. 사명감 사명감 하지만 지금의 나는 잠 못 자 가면서 환자 보는 일은 다시는 못 할 것 같다. 난 벌써 이렇게나 지쳤어요. 하지만 비록 자리와 역할은 달라도 환자 앞에서 어떤 마음가짐을 가져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울림을 준다. 환자에 대한 정확한 파악, 적확한 판단을 기반으로 한 효과적인 치료를 위해선 많이 알고 경험해야 한다. 작년은 이런저런 핑계로 좀 느슨해져 있었는데 올해부터는 좀 더 똑똑해져야 쓰것다.
더불어 필수의료의 어려움 또한 토로한다. 이 나라는 어째 많은 처치나 자원을 필요로 하는 중환을 치료하면 할수록 적자를 보는 구조다. 이는 원가보전도 되지 않는 기형적인 수가, 그리고 제멋대로인 심평원의 기준 덕분이다. 극 중에선 이런저런 지원으로 처우 개선이 아주 일부라도 되는 듯하나 그마저도 실질적인 해결책은 될 수 없다. 이 시리즈가 필수의료 문제에 대해 수가 개선을 통한 수익, 처우, 운영의 개선 같은 해결책을 제시해 준 건 아니지만 그래도 시리즈 내내 돈돈돈 거리면서 직접적인 언급을 이렇게나 많이 해 준 덕분에 세간의 문제인식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으로 보인다.
코미디
이 시리즈는 기본적으로 코미디 장르다. 차갑기만 할 것 같은 백강혁이라는 캐릭터도 개그에 적극 동참할 정도로 매 화에 걸쳐 항상 웃음을 주기 위해 노력하는 편이다. 시리즈 전반에 깔린 개그 코드가 적절하며 세련되었다. 또한 유구한 밈들을 적재적소에 잘 살려 놓은 점이 가장 마음에 든다. 보통은 인위적이고 노골적인 연출로 보일 것을 우려해 이런 밈의 활용을 꺼리는 편이며, 활용하더라도 그 당시 유행하던 밈을 어설프게 가져와 극의 흐름을 끊는 경우가 태반이다. 하지만 이 시리즈에서는 배우들의 열연을 기반으로 극에 아주 자연스럽게 녹아든다. "이거 다 새빨간 거짓말입니다. 다 아시죠?"는 실존 인물의 패러디라 좀 자제한 감이 있지만 그래도 알면 다 들리는 정도. 특히 "야 그 헬기 소리 좀 안 나게 하라!"는 대사와 사자후를 포함한 완벽한 재현이다. 이 대사는 기조실장 홍재훈을 연기한 김원해 배우가 다른 작품에서도 똑같이 재현한 걸 보면 이런 패러디엔 이 배우의 스타일이 녹아들었다고 보는 편이 맞을 듯. 하지만 이런 대사 하나하나에서 밈으로 대표되는 인터넷 문화에 대한 깊은 존중감이 느껴진다. 반면 그렌라간의 "널 믿는 날 믿어" 대사처럼 서브컬처까지 파고드는 대사도 있다.
기타 연출
해가 거듭할수록 영상 제작 기술이 좋아지며 메디컬 드라마에서의 수술 장면은 날로 세밀해지고 있다. 최신작이니만큼 이 시리즈는 국내 한정으로 가장 선명한 수술 장면을 연출했던 것 같다. 또한 남수단을 배경으로 한 모로코 로케이션은 작년 초에 봤던 TV시리즈 비방(#)이 떠오른다. 남수단 부분 한정으로 장르가 어드벤처로 바뀌는 것마저 똑같다. 반면 의료계에 너무나도 호의적인 보건복지부 그리고 너무나도 먼치킨인 백강혁이란 캐릭터는 이 시리즈의 장르가 판타지를 일부 포함하고 있음을 생각하면 그냥 고개가 끄덕여지는 선에서 그친다. 다큐가 아닌 이상 실제 현장과 다른 점은 어느 창작물에서나 똑같이 적용하는 극적인 생략과 허용이라 보는 것이 마음에 편하다. 나도 5년 전쯤엔 이런 창작물에서 다큐의 맛을 원했는데 그간 많이 누그러진 것 같다. 그리고 이 모든 연출과 전개가 백강혁이라는 먼치킨이 펑펑 내지르는 시원한 사이다 전개라 더더욱 마음에 든다. 이런 전개는 많은 이들이 최고로 꼽는 장점인 듯.
모르고 봤을 때도 좋았지만 알고 보니 원작 초월이었던 점도 더더욱 좋았다. 백강혁과 최조은의 관계에 대한 설정이 추가되며 악덕 병원장처럼만 보였던 최조은도 젊은 시절에는 눈앞의 환자를 놓치지 않기 위해 분투했음을, 그리고 지난 시절의 스스로를 떠올리며 긴 시간 동안 생각에 잠기는 그의 모습을 그려낸 장면은 이 시리즈의 대표적인 명장면 중 하나로 꼽힌다. 원작 팬들은 이 장면에서 얼마나 큰 카타르시스를 느꼈을까? 바로 이런 점이 미디어믹스의 순기능이자 희망편이다.
+ 윤경호
윤 배우는 많은 작품을 통해 접했지만 이렇게 반짝반짝한 빛을 품고 있음을 이 작품을 통해 처음 확인했다. 한 작품 안에서도 악역과 선역을 모두를 연기한다. 그가 연기한 캐릭터 한유림은 전형적인 '아군이 된 적군'이지만 윤 배우의 연기가 평범한 캐릭터도 매력적으로 만든다. 무엇보다도 한유림은 이 시리즈에서 빠질 수 없는 코미디의 가장 큰 기둥이다. 우리 아내는 청진기 돌리며 "나는 백강혁이다!"를 연신 외치는 한유림 씬에서 진짜 배 잡고 웃었다. 이런 캐릭터의 매력이 잘 묻어 나오도록 배역을 멋지게 소화해 낸 윤 배우에게 큰 박수를. 무엇보다 이 배우의 나이가 생각보다 많지 않다는 점에 더더욱 놀랐다.
전반적으로 만족했던 시리즈. 무엇보다 우리 아내가 푹 빠져 정신없이 보았던 덕분에 더욱 마음에 든다. 이런 스탠스는 재작년 봤던 <무빙> 이후 처음인 것 같다. 첫째 출산 후 삶과 일과 육아에 지쳐 함께 하는 시간을 영 못 가지다가 최근 들어 아이가 통잠을 자게 된 이후 우리 부부의 유일한 공통 취미인 TV시리즈 정주행으로 공동 시간을 다시 회복한다. 앞으로도 좋은 시리즈와 컨텐츠가 많이 나오면 좋겠다.